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페이로스 왕국 (문단 편집) === 정국 혼란 ===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알렉산드로스 1세]]가 허망하게 사망한 뒤, 알렉산드로스 1세의 미망인 클레오파트라가 어린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보호자로서 국정을 잠시 맡았다가 동방 원정을 떠난 [[알렉산드로스 3세]]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을 대리 통치하고 있던 [[안티파트로스(마케도니아)|안티파트로스]]의 궁정으로 자식들과 함께 향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아이아키데스]]'''는 [[라미아 전쟁]]에서 활역한 멤논의 딸이자 테살리아 출신인 프티아와 결혼하여 데아다미아와 [[피로스 1세]]를 낳았다. 기원전 317년 [[폴리페르콘]]과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을 놓고 내전을 벌일 때, 아이아키데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척인 [[올림피아스]]를 보호하는 폴리페르콘을 지원했다.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와 [[록사나]]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딸 데이다미아를 약혼시켰다. 그는 올림피아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그녀가 [[필리포스 3세]]와 에우리디케를 물리치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알렉산드로스 4세를 앉히는 걸 도왔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을 떠나 있던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올림피아스를 공격했다. 그는 올림피아스를 도우러 출정했으나 카산드로스의 부관이 이끄는 적군에 가로막혀 진격하지 못하다가 군영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귀환해야 했다. 이이아키데스가 나라를 떠나 있던 기원전 317년, 에페이로스에서 정변이 일어나면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정변 주모자들은 카산드로스의 편을 들었고, 카산드로스는 리키코스를 에페이로스로 보내 그를 대적하게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했고, 당시 유아였던 [[피로스 1세]]는 아버지의 추종자들과 함께 일리리아의 왕 [[글라우키아스]]에게 의탁했다. 이리하여 네오프톨레모스 2세가 입지를 굳혔지만, 실권은 마케도니아 왕국이 쥐었다. 기원전 313년, 마케도니아의 압제에 지친 에페이로스인들이 봉기하여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몰아내고 '''[[아이아키데스]]'''를 복위시켰다. 카산드로스는 형제 필리포스에게 군대를 맡겨 에페이로스를 치게 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첫번째 전투에서 패배했고 자신을 복위시킨 인사 50명이 카산드로스에게 끌려갔다. 그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한 뒤 오이니아데스에서 2번째 전투를 치렀으나, 또다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에페이로스인들은 아이아키데스의 형제인 '''[[알케타스 2세(에페이로스)|알케타스 2세]]'''를 새 군주로 내세우고 마케도니아에 계속 항전했다. 카산드로스는 에페이로스인들이 새운 왕이 기반을 굳히기 위해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부관 리시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알케타스는 이에 맞서 알렉산드로스와 테우크로스를 여러 정착촌으로 보내 군대를 모으게 하고, 자신은 현재 보유한 병력을 이끌고 적군과 대치한 채 아들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페이로스인들은 리시코스의 병력이 우월한 걸 보고 겁에 질려 항복했고, 그는 에페이로스의 도시 에우리메네스로 피신했다. 리시코스가 에우리메네스를 포위공격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와 테우크로스가 이끄는 에페이로스군이 도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리시코스가 불리한 상황에 처했지만, 데이니아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추가로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에우리메네스에서 탈출하여 산악 요새로 피신했고, 리시코스는 에우리메네스를 함락한 뒤 철저하게 약탈했다. 알케타스 2세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군을 이끌고 에페이로스로 접근하고 있던 카산드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앞으로 마케도니아의 봉신이 될 테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카산드로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그가 왕위를 계속 이어가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그의 병력을 차출하여 아폴로니아 공방전에 투입시켰다. 그 후 통치를 몇년간 이어갔으나 백성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결국 기원전 307/306년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백성들의 봉기로 어린 두 아들 헤시오네오스, 니시오스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 후 일리리아 왕 글라우키아스가 11세 또는 12살이었던 '''[[피로스 1세]]'''를 에페이로스의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302년 일리리아에서 사귀었던 소꿉친구 한 명이 초대한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일리리아인들에게 의존하는 왕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사촌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왕위에 앉히는 바람에 권력과 재산을 모두 잃고 당시 중동 최강의 권력자 [[안티고노스 1세]]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피로스의 누이 데이다미아와 결혼했다.] 진영으로 망명했다. '''[[네오프톨레모스 2세]]'''는 복위 후 수 년간 에페이로스 왕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기원전 296년 피로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부터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지원받고 에페이로스에 돌아오면서 왕좌를 위협받았다. 그렇지만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들이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피로스 1세는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다가 두 사람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 왕은 각자 세력을 끌어모으고 상대를 실각시킬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어느 날, 피사로나에서 연례 행사가 개최되었다. 왕과 신하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선물을 교환할 때,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인 겔론이 피로스에게 쟁기질하는 소 한쌍을 선물로 줬다. 피로스의 종 미르틸로스가 피로스에게 이 소들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겔론은 이 기회를 틈타 미르틸로스에게 피로스를 암살하는 계획에 가담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미르틸로스는 이 모든 계획을 피로스에게 보고했다. 피로스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신뢰하는 부하 알렉시크라테스도 음모에 가담하는 척하게 했다. 한편, 네오프톨레모스 2세는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여동생 카드메이아의 집에서 동지들과 공공연히 음모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하녀 파이나레티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자는 척하면서 모든 것을 주의깊게 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비밀리에 피로스의 아내 안티고네를 찾아가 모든 걸 밝혔다. 안티고네는 희생제가 치러지는 날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극비리에 숨겨둔 암살자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했다. 이후 알렉시크라테스가 피로스에게 보고한 명단에 적힌 가담자 전원이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피로스는 에페이로스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